일본 정부가 38~40촌에게 계승권 다시 준 과정 4편
1842년 닌코의 5촌 조카이자 고메이의 6촌 형인 5대 간인노미야 당주 나루히토가 독신으로 죽으면서 계승가능한 가장 가까운 친척은 닌코의 8촌 할아버지이자 고메이의 9촌 증조할아버지인 아리스가와노미야 츠나히토가 되었다. (구니이에는 부계기준 닌코의 27촌 삼촌)
5대 간인노미야 당주 나루히토가 사망할 당시 후시미노미야보다 혈통상 훨씬 가까웠던 아리스가와노미야의 간략한 계보는 다음과 같다.
5대 아리스가와노미야 당주 요리히토(1713 ~ 1769)
2 ~ 4, 6남 : 스님
7남 오리히토 : 6대 아리스가와노미야 당주
6대 아리스가와노미야 당주 오리히토(1753 ~ 1820)
차남 츠나히토 : 7대 아리스가와노미야 당주
3 ~ 5, 8남 : 스님
7대 아리스가와노미야 당주 츠나히토(1785 ~ 1845)
장남 다카히토 : 8대 아리스가와노미야 당주
차,3남 : 스님
8대 아리스가와노미야 당주 다카히토(1812 ~ 1866)
장남 다루히토 : 9대 아리스가와노미야 당주 (1835 ~) : 나루히토 사망당시 7세
아리스가와노미야도 관습에 따라 1명 빼고 전부 스님으로 내보냈더니 1842년 시점 아리스가와노미야에선 꺼내 쓸 사람이 없었다. 따라서 꺼내 쓸 사람은 구니이에의 아들들밖에 없게 되었다
20대 후시미노미야 당주 구니이에의 아들 중 성인으로 성장한 아들은 다음과 같다.
장남 아키라 (1816 ~ 1898) - 초대 야마시나노미야 당주
차남 요시히토 (1821 ~ 1868) - 자녀 X
4남 아사히코 (1824 ~ 1891) - 초대 구니노미야 당주
6남(적장남) 사다노리 (1836 ~ 1862) - 21대 당주, 자녀가 모두 유년기에 사망, 후손 X
8남 아키히토 (1846 ~ 1903) - 자녀 X
9남 요시히사 (1847 ~ 1895) - 2대 기타시라카와노미야 당주 (초대 당주였던 동생은 16세에 요절)
12남 히로쓰네 (1851 ~ 1876) - 초대 가초노미야 당주, 2대 당주인 아들도 8살에 죽어 후손 X
14남(적3남) 사다나루 (1858 ~ 1923) - 22대 당주
15남 키요스 이에노리 (1862 ~ 1923) - 스님 - 복귀 - 신적강하를 한 사람, 계승권 X
16남 고토히토 (1865 ~ 1945) - 6대 간인노미야 당주
17남 요리히토 (1867 ~ 1922) - 초대 히가시후시미노미야 당주
구니이에의 아들 17명 중 성인으로 성장한 아들은 총 11명. 원래 사다노리를 제외한 나머지 형제들은 전부 스님으로 쫓겨났었다. 그러나 일본 역사상 천황이 제일 힘이 셌던 고메이 말기 ~ 메이지 시대 50년을 맞이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앞서 말했듯 천황의 힘이 세지면서 막부가 하던 일을 하나둘 가져오기 시작했는데 정작 종친이 멸종 직전이니 고메이 메이지 부자는 구니이에의 아들들을 전부 스님에서 복귀시켰다.
메이지는 구황족들과의 유대를 다지기 위해 성인으로 성장한 자신의 딸 4명을 전부 구황족들과 혼인시켰다. (당시 부계 32촌 할아버지, 모계 15촌 아저씨). 배우자 4명은 각각 츠네히사, 나루히사, 야스히코, 나루히코였다. 이렇게 종친이 너무 많아지니 유지비(세금)이 많이 들어가 전통대로 각 집안의 후계자 빼고 전부 신적강하를 하는 것으로 결론낸 후 2차대전까지 관습이 유지됐다.
2차대전에서 대패한 일본의 대변화는 황실에도 불어닥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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