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의 진실 ㅡ 정천식님 글 퍼옴
굳이 유시민작가 얘기가 아니더라도
고문의 고字도 모르는 것들이
유시민을 배신자로 조롱하는게 못내 눈꼴 시었는데
그걸 점잖게 지적한 분의 글을 공유합니다.
나같으면
치과에서 잇몸에 꽂는 마취주사를
입안에 100개를 한번에 꽂고 휘젖고
그걸 5분에 한번씩 밤새 한다고 상상해보라고
해주고싶습니다.
시시정천식님 페이스북 퍼옴.
유시민 작가가 대학생 때인 1980년 5월에 군 보안사(당시에 군 보안사에 경찰, 검찰이 파견되었고 합동수사본부가 설치되어 있었다)에 연행된 뒤 학생운동의 동지들을 배신하고 모두 술~술~ 불어버린 패륜아라는 내용의 페이스 북 글을 읽었다.
아래는 이에 대한 나의 답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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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당시 군 보안사에 연행된 사람들이 어떤 험한 꼴을 당했는지 그대들은 알고 있는가?
'매'나 '고문' 앞에는 장사가 없다는 말이 있다.
예를 들어 A와 B라는 동지 두 사람이 연행되어 취조를 받는다고 가정하면 두 사람의 진술은 각기 다른 부분이 존재할 수 있다.
A는 '갑'이라는 사람에 대해 진술을 했는데 B는 '갑'이라는 사람에 대해 숨기고 진술하지 않았다면 B는 갖은 쌍욕과 함께 극심한 구타와 고문을 받게 된다.
당시는 심지어 없는 사실까지 지어내서 고문으로 허위진술을 받아내는 조작이 횡행하던 때다.
당시는 일제의 사슬에서 풀려난 지 35년이 되는 해다.
그때까지만 해도 일제시대에 독립운동을 했던 애국지사들에게 행해지던 고문 기술이 그대로 이들에게 전수되어 고문이 예사로 행해지던 때다.
노련한 사람은 이들이 연행된 첫 날에는 취조를 하지 않는다.
첫 날에는 속칭 "발발 기도록" 또는 "오줌을 지리도록" 혹독하게 조진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본격적인 취조가 이루어지는데 "첫 날에 혹독하게 조지니 술~술~ 불더라"는 일제시대의 친일 경찰들이 행했던 경험들이 35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그대로 이들에게 전수된 결과다.
더구나 1980년 당시는 비상계엄이라는 엄혹한 시기라 고문이 너무도 당당하게 그리고 당연하게 횡행하던 시기다.
빨갱이는 죽어도 되니까 말이다.
유시민 작가와 같은 1980년 비상계엄 시기에 부산 보안사(속칭 삼일공사)에 연행된 임기윤 목사는 고문으로 목숨을 잃었다.
몇 년 전에 재심을 청구해서 고문으로 인한 가혹행위로 사망했다는 판결을 받아냈다.
박종철 열사는 1980년도보다 7년 뒤에 고문으로 인해 목숨까지 잃었다.
5.18 당시에 연행된 운동권 인사는 속칭 '빨갱이'로 취급되던 때이고 취조를 맡은 사람은 공공연하게 '너같은 놈은 죽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고 떠들던 때다.
게다가 이들은 학교나 직장에서 쫓겨나서 경제적으로 많은 고통을 당했다.
당시만 해도 회사(주로 대기업)에 취직을 하려면 신원조회라는 것이 있어 학생운동 전력이 있는 사람은 불이익을 받아 취직조차도 어려웠다.
그리고 이 때는 고문으로 병신이 되거나 죽은 사람도 부지기수로 많았던 야만의 시대였다.
사육신 중의 한 분이신 성삼문 선생이 인두질로 고문을 받던 당시에 이런 전설적인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왕위를 찬탈한 세조가 성삼문 선생을 직접 취조(국문)를 했는데 인두를 숯불에 벌겋게 달구어 생살을 지질 때 성삼문 선생은 세조를 향해 "이 쇠 차다, 다시 구워오라"고 호기롭게 일갈을 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당신은 무슨 권리로 동지를 배반했다고 유시민을 매도할 수가 있나?
당신은 이런 혹독한 고문을 견디고 독야청청할 자신이 있느냐고 거꾸로 되묻고 싶다.
그래서 운동권 출신들은 고문으로 인한 자백을 동지를 향한 배신이라고 절대로 말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다.
말 좀 가려서 하시라!
박정희 대통령은 해방 후 국군 내의 남로당 조직의 총책이었다.
국군 내의 남로당 인사 색출로 연행된 박정희 소령은 일제의 꼭두각시였던 만주국에서 설립한 육군사관학교에서 친분을 다진 백선엽 장군의 회유로 남로당 조직을 자백하는 대신 자신만 살아남고 나머지 동지들은 모두 제거되었다.
박정희 장군이 5.16 쿠데타에 성공한 뒤 자신의 친형 박상희의 절친이자 사상적 동지였던 황태성이 북한의 특사자격으로 만나자는 연락이 왔을 때 박정희는 만나지 않고 그를 죽여버렸다.
황태성은 박정희가 자신의 친형 이상으로 믿고 따르던 사람이자 사상적 동지였다.
1975년 4월 9일은 인혁당재건위 사건으로 8명의 자주통일인사들이 판결 다음 날 사형이 집행된 날이다.
이수병 선생의 시신을 인수한 유족들의 증언에 따르면 전기 고문으로 시신이 여러 군데 새까맣게 탔다고 했다.
인터넷을 뒤져보면 이수병 선생의 가족이 공개한 시신사진을 볼 수 있다.
박정희 정권은 고문의 증거를 없애기 위하여 시신을 탈취해서 화장을 해버렸다.
인혁당재건위사건은 훗날 재심에서 무죄로 판결이 났다.
하지만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 올 수는 없다.
이에 더해 남은 가족들은 연좌제의 굴레로 빨갱이 가족으로 갖은 손가락질이나 불이익을 당했고 그 자녀들은 취업에서 배제되어 심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큰 고통을 당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사건을 조작한 사람들은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다.
수년 전부터 나는 8.15 이후 우리나라의 현대사를 집중적으로 공부를 하고 있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내가 모르는 부분이 너무도 많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여러분들께서는 이런 현대사를 제대로 모른 채 함부로 섣부른 판단을 하지 마시길 당부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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