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Skip)된 시간들
1장: 서랍 속의 30분
중학교 2학년인 나에게 일상이란 온통 '귀찮은 것들'의 연속이었다.
끝없는 시험공부, 매일 반복되는 청소 시간, 지루하다 못해 하품만 나오는 수학 수업.
그리고 아침마다 현관까지 따라 나오는 엄마의 잔소리.
"숙제 챙겼어? 우산은? 급식 남기지 말고. 학원 끝나면 바로 전화하고."
나는 대답 대신 문을 쾅 닫는 걸로 인사를 대신하곤 했다. 나에게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나를 짓누르며 억지로 견뎌내야 하는 짐이었다.
어느 비 오는 방과 후, 나는 교실 뒤편 오랫동안 비어 있던 분실물 보관함을 정리하라는 번거로운 주번 활동을 맡게 되었다. 투덜거리며 먼지 쌓인 상자들을 치우던 내 손끝에 작고 탁한 붉은색 상자가 걸렸다.
상자를 열자 손바닥에 쏙 들어오는 투박한 회색 스위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위에는 단 하나의 정체 모를 붉은 버튼이 솟아 있었다. 버튼 옆에는 정갈한 글씨로 적힌 작은 설명서 한 장이 접혀 있었다.
[ 30분 도약 버튼 ]
이 버튼을 누르면 현재 시점으로부터 정확히 30분 후로 이동합니다.
이동하는 30분 동안 당신의 몸은 현실의 흐름을 그대로 수행하지만, 당신의 의식은 그 시간을 경험하지 않습니다.
주의: 실수나 장난으로 누르지 마십시오. 흘러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으며, 신중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뭐야 이거? 소설을 쓰세요, 소설을."
나는 코웃음을 쳤다. 장난감치고는 제법 그럴싸한 장난이라 생각하며, 무심결에 붉은 버튼을 딸깍 눌렀다.
'딸깍.'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번개가 치지도 않았고, 주변 공간이 왜곡되지도 않았다.
"그럼 그렇지."
나는 혀를 차며 버튼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청소를 계속했다.
버튼이 진짜 얼굴을 드러낸 건 다음 날 아침이었다.
수학 시간에 불시에 치러진 단원 평가. 어젯밤 교과서를 대충 넘겨본 게 전부인 나는 시험지를 받아 든 채 얼어붙었다. 교탁 앞에 선 선생님의 매서운 눈초리, 하얀 시험지 위를 가득 채운 기호들, 째깍거리는 시계 소리. 목구멍이 좁아지는 것 같았다.
'아, 진짜 싫다. 딱 30분만 지나서 시험 끝났으면 좋겠다. 정답이고 뭐고 다 귀찮아.'
주머니 속을 만지작거리던 손가락 끝에 어제 주운 회색 스위치가 걸렸다. 반신반의하며, 아니 어쩌면 그저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에, 나는 주머니 속에서 버튼을 꾹 눌렀다.
'딸깍.'
눈을 한번 깜빡인 순간이었다.
"자, 시험지 끝에서부터 거둬라."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창밖의 햇살 위치가 달라져 있었고, 내 책상 위 시험지에는 놀랍게도 내가 쓴 것 같은 글씨로 정답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시계는 정확히 30분이 지나 있었다.
시험을 치른 기억은 전혀 없었다. 잠깐 잠들었다 깬 것 같은데, 마킹까지 완벽하게 끝나 있었다.
"말도 안 돼…… 진짜잖아?"
손바닥이 축축해졌다. 그런데 그건 무서움이 아니었다.
앞으로 마주할 모든 귀찮은 순간들을 단번에 건너뛰게 해 줄 '치트키'를 손에 쥐었다는, 거부할 수 없는 지독한 달콤함이었다.
2장: 스킵(Skip)하는 삶
그날 이후, 내 삶의 모든 '귀찮은 순간'에는 항상 붉은 버튼이 함께했다.
수능 시험 날? 딸깍. 눈 한번 감았다 뜨니 시험이 끝나 있었고, 내 손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답안지를 채워 놓았다.
군대 훈련소? 딸깍. 힘들고 지치는 훈련 시간마다 버튼을 누르니 어느새 행군이 끝나 있었고, 눈을 몇 번 깜빡였을 뿐인데 전역증이 손에 쥐여 있었다.
대학 수업, 취업 면접, 회사의 야근까지. 불편하거나 어려운 모든 순간은 버튼 하나로 건너뛸 수 있는, 재미없는 영상의 한 장면에 불과했다.
스물다섯 살 겨울, 고등학교 때 단짝이던 태오에게 전화가 왔다.
"야, 우리 얼굴 본 지 이 년 됐다? 살아는 있냐?"
오랜만에 만난 태오는 곱창집에서 소주를 시켜 놓고 실없는 농담을 하다가, 문득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민우야. 너 요즘…… 뭔가 이상해. 뭐랄까, 같이 있는데 여기 없는 사람 같아."
태오가 내 눈을 똑바로 봤다. 무슨 말이든 해야 했다. 그런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나는 이런 대화를 해 본 적이 없었다. 친구의 진심 앞에서 내 진심을 꺼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식탁 아래로 내린 손이 저절로 주머니를 찾았다.
'딸깍.'
눈을 뜨니 곱창집 앞이었다. 태오는 벌써 저만치 골목 끝을 걸어가고 있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날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 나는 모른다. 다만 그 후로 태오에게서는 다시 전화가 오지 않았다.
엄마는 일요일 저녁마다 전화를 걸었다.
"밥은 먹었어? 김치 보내줄까? 회사에서 무리하지 말고……."
똑같은 레퍼토리. 나는 "네, 네" 두 번쯤 하고는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딸깍. 눈을 뜨면 통화는 끝나 있었다. 편했다. 엄마의 목소리는 언제든 다시 들을 수 있는 거니까.
서른다섯 살 가을,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하얀 침대에 누운 엄마는 내가 기억하던 것보다 훨씬 작았다.
엄마가 마른 손으로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민우야, 엄마가 너한테 꼭 하고 싶은 말이……."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 말을 들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들어버리면, 엄마가 정말 떠난다는 걸 인정해야 할 것 같았다. 무섭고, 무겁고, 감당이 안 됐다.
나는 엄마의 손을 잡은 채, 다른 손으로 주머니 속 버튼을 눌렀다.
'딸깍.'
눈을 떴을 때, 병실 창밖은 어두워져 있었다.
엄마의 손은 아직 내 손 안에 있었지만, 더는 따뜻하지 않았다.
간호사가 조용히 말했다. 임종 직전까지 아드님 손을 꼭 잡고 뭐라고 말씀을 하셨다고.
아드님이 고개를 끄덕이며 우셨다고.
나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엄마의 마지막 말을, 내 귀는 들었는데 나는 듣지 못했다.
그날 밤 나는 버튼을 쓰레기통에 던졌다. 그리고 삼십 분 뒤에 도로 주워 왔다.
버튼 없이 남겨진 나는, 장례식장에서 어떻게 서 있어야 하는지조차 모르는 사람이었으니까.
마흔, 쉰, 예순.
쉰 살이 되던 해, 회사 창립 10주년 기념식이 있었다.
직원들이 돌아가며 옛날 이야기를 꺼냈다. 첫 사무실 보일러가 터졌던 겨울.
밤새 컵라면을 먹으며 첫 계약서를 쓰던 날.
내가 울면서 직원들을 한 명씩 껴안았다는 어느 송년회.
"대표님, 그때 기억나시죠?"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나지 않았다. 단 하나도.
스크린에 뜬 사진 속에서 직원들과 어깨동무를 한 남자는 분명 내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 사진이 찍히던 자리에 없었다.
거울 속의 나는 고급 수트를 입은, 제법 잘나가는 사업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통장에는 돈이 쌓였고, 사람들은 나를 '어떤 위기에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건 내가 아니었다. 내 진짜 정신은 여전히 그 비 오던 날의 교실, 중학교 2학년에 멈춰 있었다.
버튼을 누르지 않고 현실에 남겨지면, 나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열다섯 살일 뿐이었다. 내가 직접 입을 열었다가 '다른 나'가 쌓아 올린 이 완벽한 삶을 무너뜨릴까 봐 두려웠다. 두려움이 밀려올 때마다 나는 버튼을 눌렀고, 버튼을 누를수록 두려움은 커졌다.
나는 내 삶의 주인이 아니었다. '다른 나'가 살아가는 모습을 창밖에서 구경하는, 방관자였다.
3장: 아흔 살의 침대
일곱 번, 여덟 번의 십 년이 찰나처럼 흩어졌다.
하얀 병실. 정적 속에서 산소호흡기 소리만 주기적으로 울렸다.
아흔 살의 나는 침대에 누워 마지막 숨을 고르고 있었다.
세상은 나를 성공한 인물이라 불렀다. 넓은 저택, 넘쳐나는 통장 잔고, 내 이름으로 된 수많은 업적.
밖에서 보기엔 부러울 것 없는 일생이었다.
하지만 그 껍데기 안의 나는, 여전히 주번 활동을 싫어하던 열다섯 살에 머물러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옷자락 속 스위치를 쥐어 보았다. 이제는 버튼을 누를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결국 내 인생은 뭐였지. 성공했다고들 하는데…… 이게 정말 내 인생이긴 한가?'
그때, 아득해지는 의식 속에서 낯선, 그러나 더없이 익숙한 목소리가 울렸다.
"고생 많았어."
나직하지만 단단한, 어른의 목소리였다.
"누…… 누구야? 버튼 속의 '다른 나'인가?"
목소리의 주인이 씁쓸하게 웃었다.
"다른 나 같은 건 없어. 난 처음부터 너였어."
"거짓말 마! 시험을 풀고, 회사를 키우고, 인생을 성공시킨 건 네가 한 거잖아!"
목소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무언가가 떠올랐다. 아니, 떠오른 게 아니라 원래부터 거기 있었다.
시험지 위를 달리던 내 손. 면접장에서 떨리는 목소리를 삼키던 내 목.
곱창집에서 태오의 눈을 피하지 않고 무슨 말인가를 하던 내 입.
전부 내 몸이 한 일이었다.
나는 처음부터 해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
단지, 그 자리에 있지 않기로 했을 뿐이다.
칠십오 년 동안 한 번도 인정하지 않았던 사실이,
이제야 몸 안 어딘가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내가 두려워한 건 시험도, 면접도, 회사도 아니었다.
내가 직접 살아 보는 것. 그게 무서웠던 것이다.
"……하나만 물어볼게."
나는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가 마지막에…… 뭐라고 하셨어?"
목소리는 한참 동안 대답이 없었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네 몸은 기억하고 있어. 그날 네가 왜 울었는지도.
다만 네가, 그 순간에 없었을 뿐이야."
뜨거운 것이 늙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듣고 싶었다. 이제 와서, 세상 무엇을 다 주고서라도 듣고 싶었다.
일요일 저녁의 그 지겹던 잔소리까지도. 밥은 먹었느냐고, 김치를 보내 주겠다고,
무리하지 말라고 하던 그 목소리까지도, 전부.
심장 박동기의 간격이 점점 벌어지고 있었다.
나는 옷자락 속의 회색 스위치를 마지막으로 한 번 쥐었다.
이 순간이야말로 평생 가장 도망치고 싶은 순간이었다.
무섭고, 아프고, 감당할 수 없는 순간.
그런데 나는, 손에서 힘을 풀었다.
버튼이 스르륵 미끄러져 침대 아래로 떨어졌다.
바닥에 부딪히는 작은 소리가 났다. 딸깍, 이 아니라, 툭.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는 도망치지 않았다.
숨이 느려지는 것을, 병실의 차가운 공기를,
창밖으로 지는 노을의 붉은빛을,
나는 하나도 건너뛰지 않고 느꼈다.
그것이 내가 처음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직접 살아 본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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