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의 평양 중국인 화교 대학살사건 ( 1931년 )

사건의 발단 : 1931년, 일제의 만주 진출 이후 만주는 피식민지배를 당하던 조선인들에게 기회의 땅, 일확천금의 땅으로 선전되어 많은 조선인들이 만주로 갔습니다 .
만주로 건너가 땅을 구매하고 간척하던 도중, 기존에 거주하던 만주 지역 중국인들과 갈등이 있었는데, 일제는 조선인 보호라는 명목으로 이에 게입하게 되었어요 .
그런데 말입니다 .
일제에서는 조선 지역 언론사에 이런 찌라시를 풀게 됩니다 .
??? : 글쎄, 만주의 중국인들이 만보산 사건에서 조선인들을 학살하고 능욕했다더라 .
당시 일제의 허가 하에 신문을 내던 언론사들은, 이렇기 풀린 정보로 하나같이 만보산 사건을 중국인의 조선인 학살사건으로 보도했습니다 .
이러한 정보를 들은 조선인들은, 지난 20년간 (사건의 시점은 1931년) 억눌려온 피식민지배 울화와 중국인 혐오감정이 한순간에 들끓었고

경기도와 인천에서 연이어 화교가 사는 곳에 쳐들어가 폭동을 일으키게 됩니다 .
그러다가 절정에 치닫은 사건이 벌어졌으니 바로 평양 화교 대학살 사건 입니다 .
당대 평양은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불릴 만큼 조선에서 가장 천주교 신자가 많고 제일 보수적인 곳이었어요 .
반대로 대구는 동방의 모스크바로 조선에서 제일 진보적인 사회주의 물결이 일어나던 곳 .
이 평양에 밤 11시, 조선인들은 조직적으로 움직여 칼, 도끼를 들고 화교들이 모여사는 곳을 쳐들어가 자비없이 난도질 하기 시작했어요 .
조직적으로 조를 나눠서 화교를 색출하여 살인과 약탈 방화 그리고 강간까지 했답니다 .

(당시 현장을 사진으로 남긴 평양 화교 거리)
당시 동아일보는 만보산 조선인 학살 사건이 오보임을 밝혔으나, 배화(화교배척) 폭동은 전국을 걸쳐 벌어졌어요

이런 배화사건은 당대 일제 강점기 치하 조선인들의 마음이 자리잡은 피해자라는 울분과
당시 제국의 식민지 일원으로 만주라는 곳에 중국인들을 몰아내고 스스로를 "식민"하기 시작한 가해자성 면모를 동시에 보여주는 양면성을 띄는 사례라고 역사 전문가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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