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장(LC) 자동 검토 — 이제 길드에서 바로서류 업로드 → AI 불일치 분석 → 수정 가이드 제공.
NEW LC 검토 시작하기 →
← 자유게시판

아랍 세력의 확산에 대하여

‌

7세기에 이슬람 군대가 이집트를 통치하던 로마를 격파했을 때 무슬림의 군사전략에서 해군력은 우선순위가 높지 않았다. 유럽 대륙에서 무슬림의 적이었던 로마인은 비잔틴 사람들이라고 불렸는데, 그들은 항해에 관한 견해가 달랐다.
비잔틴 사람들은 배를 몰고 가서 아랍인이 새로 점령한 이집트의 영토를 침범하곤 했다. 아랍인이 자리 잡은 영토를 공격하기 위해 해군 함대를 보내는 로마인의 전략은 오래된 전통이었다. 비잔틴은 그런 식으로 북아프리카 곳곳에서 무슬림의 영토에 해군을 보내 큰 피해를 입혔다.
비잔틴의 함대가 바르카라는 도시를 공격했을 때는 아랍인을 궤멸시켰을 뿐 아니라 북아프리카의 통치자를 살해하기도 했다. 이러자 아랍인은 해군력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를 바꿔 그들의 적인 비잔틴이 사용하는 것과 똑같은 하기로 했다.
아랍인은 함대가 정박할 본진으로 알렉산드리아를 선택했다. 7세기 후반 페르시아에서 북아프리카가지 뻗어나갔던 아랍제국의 칼리프 역시 아랍제국의 자치령들 때문에 해상 전투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그는 아랍이 차지한 북아프리카의 이프리키야에 있는 수석 행정관에게, 주요 항구에서 적의 어떤 도발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대함대를 건설하는 것이라고 조언했다.
아랍인은 건조 중인 함대가 완성되면 육지와 바다 양쪽에서 서양인과 싸울 능력을 갖추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들은 매우 공격적인 계획을 세웠다. 바로 유럽 해변에 상륙하는 것이었다.
튀니스에서 건조한 배들은 큰 성공을 거뒀다. 이븐 할둔은 지중해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섬인 시칠리아를 정복한 것은 이 배들이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기록했다. 시칠리아 섬도 가치가 있었지만 무슬림이 보기에 이베리아 반도, 그중에서도 오늘날의 스페인 지역과 비교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베리아 반도는 무슬림이 정복한 영토 중에서 가장 매력적인 땅이었다. 알마카리는 그런 감정을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표현했다. "우리에게 안달루시아는 군마를 전속력으로 몰아 풍요로운 땅을 정복한 기병들이 거머쥔 상이다"
이베리아 반도의 풍경은 칭송할 만했다.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어딜 가도 흐르는 물, 과일나무와 숲이 보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건조하고 나무가 없는 땅에서 온 정복자들은 이베리아 반도를 에덴동산에 비유했다. 시인 이븐 하파자는 이베리아 반도 북동부의 산림지대가 천국인 것처럼 노래했다. 그는 시에서 이 반도가 선사하는 달콤한 삶을, 입맛을 돋우는 과일, 늦은 오후의 그늘, 맛있는 꿈이라고 비유했다.
아랍인은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이베리아 반도의 흐르는 물과 숲을 이용했다. 하천이 많아서 내륙 깊숙이까지 배가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에, 강변과 해변에 큰 조선소를 많이 지어놓고 이베리아 반도의 천연자원을 신속하게 활용했다.
무슬림 함대는 인상적인 업적을 세웠다. 이븐 할둔은 호전적인 어조로 서술했다. "그들은 바다 곳곳에서 승리를 거뒀다. 그들의 힘과 우월성은 점점 강력해졌고 어떤 기독교 국가도 그들의 함대와 상대할 수 없었다"
10세기가 되자 지중해에 있는 항구의 대부분은 아랍인들과 군수물자들로 채워졌고 그 바다에는 수많은 무슬림의 배가 끊임없이 오갔다. 그리고 기독교인의 배는 감히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다. 지중해가 결국 유럽의 바다에서 아랍의 호수가 된 것이다.
모든 면에서 아랍 함대는 100년 가까이 유럽의 물길로서 로마제국과 그 제국의 후계자들에게 주요한 소통의 수단이었던 지중해를 아랍의 호수로 바꿔놓은 것이다.
기독교인이 지중해에서 퇴각하자 서유럽 정치권력의 중심이 북쪽으로 이동했다. 그렇게 중심지가 스페인, 이탈리아쪽에서 프랑스, 독일쪽으로 바뀌면서 일어난 문화적, 경제적, 정치적, 종교적, 사회적 변화는 오늘날까지도 느낄 수 있다.
지중해의 기독교 도시들이 수탈과 약탈의 위협을 받으며 정체되어 있는 동안, 무슬림이 통치하는 해안지대에서는 새로운 항구들이 번화했다. 이슬람이 지중해 전체에서 교역으로 창출한 막대한 부는 10세기에서 12세기까지 카이로의 발전을 통해 드러난다.
카이로는 바그다드를 뛰어넘는 이슬람 세계의 중심지가 되었다. 985년에 여행가 아부 압둘라 알무카다시는 카이로가 세계의 중심이 됐다는 소감을 남겼다. 세계에서 그보다 빛나는 도시를 알지 못한다라는 그의 주장은 카이로가 만물 최고의 도시가 됐다는 뜻이다.
11세기 페르시아의 위대한 시인인 나시르 후스라우는 카이로에 방문했다가 다양하고 풍부한 상품들을 보고 경탄했다. "다른 어떤 곳에서도 그런 시장을 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온갖 희귀한 물건들이 그곳에 있었다"
아랍인이 지중해 일대와 그 주변의 땅을 지배하자 카이로의 운송 문제도 쉽게 해결되었다. 이집트 역사를 통틀어 그렇게 많은 지역에서 당장 활용할 수 있는 자원을 그 정도로 많이 가져왔던 시대는 없었다.
하지만 행복한 상황이 계속 이어지지는 않았다. 아랍 세계는 부패, 분열때문에 힘을 잃어갔다. 역사학자 알마카리는 그런 상황이 신의 잔혹한 적인 유럽인들이 분열된 무슬림을 공격해서 그런 것이라고 편파적으로 서술했다. 이븐 할둔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시칠리아, 크레타, 몰타 같은 섬들이 쳐들어와 재물을 빼앗아갔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시리아 해안지대로 군대를 보내 그 지역의 상당부분을 장악했다"
15세기에 이르자 무슬림이 유럽인에게서 상품들과 노예를 사들이면서 아주 많은 양의 금을 지불했기 때문에, 국제수지의 균형은 유럽에 유리한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이런 교역을 발판 삼아 벤네치아 공화국은 운송업을 발전시켜 지중해 동부를 장악했으며, 이 과정에서 확보한 금속화폐로 도양의 사치품을 구입해 유럽 시장에 재판매했다. 이렇게 중개무역을 해서 얻은 이익 덕분에 베네치아 공화국은 르네상스 시대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가 됐다.
무슬림 세계가 쇠퇴한 것과 동시에 베네치아 공화국의 국력이 신장한 것은 지중해 역사의 순환 개념에서 또 한 번의 대변동이었다.

댓글 0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