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문) 사자의 나라, 마지막 황제 - 에티오피아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 이야기 1
오늘부터 에티오피아의 마지막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에 대한 이야기와 한국과 얽힌 이야기를 풀어봅니다.
재미있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사자의 나라, 마지막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와 에티오피아의 100년
프롤로그 — 붉은 관
2000년 11월 5일 아침, 아디스아바바는 건기의 맑은 하늘 아래 있었다. 고원 도시의 11월은 우기가 끝나고 공기가 가장 투명해지는 계절이다. 메스켈 광장 주변 도로에는 이른 시간부터 사람들이 나와 있었고, 상인들은 좌판 접고 인도 쪽으로 물러섰다. 경찰은 통제선을 쳤지만 열의는 없어 보였다. 에티오피아 정부가 이날 행사를 국장이 아니라 사적인 장례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사자 갈기를 쓴 노병들
행렬은 바타 마리암 교회에서 출발했다. 관을 실은 차량 앞뒤로 네 명의 전사가 걸었다. 사자 갈기로 만든 머리 장식을 얹고 방패와 창을 든 차림이 었는데, 그것은 백 년 전 아두와 전장의 복장이었고 그들 중 몇은 실제로 제국 근위대의 마지막 세대였다. 관은 에티오피아 국기에 덮여 있었다. 깃발 위에 수놓인 문장은 한쪽이 용을 찌르는 성 게오르기우스, 다른 한쪽이 왕관을 쓴 사자였다. 유다 지파의 사자. 이 나라의 왕들이 삼천 년 동안 자기 것 이라 주장해 온 짐승이었다.
행렬은 시내를 크게 돌아 성 게오르기우스 성당 앞에 멈췄다. 이 도시에서 그 성당이 갖는 의미는 특별했다. 정확히 70년 전 그 자리에서, 관 속의 남자는 왕중의 왕이라는 왕관을 썼다. 그날 성당 앞에는 영국 왕실의 공작과 프랑스의 원수와 이탈리아의 왕족이 앉아 있었고, 세계의 신문기자들이 몰려와 아프리카의 대관식을 타전했다. 이제 그가 같은 자리에 다시 왔다. 이번에는 눕혀진 채, 그리고 놀라울 만큼 작은 관 속에. 그의 유해는 8년 전, 국립궁전 집무실의 콘크리트 바닥을 뜯던 인부들의 삽에 걸려 나왔다. 죽은 지 17년 만이었다.
마지막 목적지는 성삼위일체 대성당이었다. 그가 살아 있을 때 직접 짓게 한 건물이고, 그 안에는 그가 생전에 주문해 둔 무덤이 반세기 동안 비어 있었다. 붉은 화강암을 깎아 만든 석관인데, 모양이 유럽식도 아니고 아프리카 여느 왕가의 것도 아니다. 북부 악숨에 서 있는 고대 오벨리스크를 본떴다. 그는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관의 형태로 남겨두었던 셈이다. 똑같이 생긴 석관이 그 옆에 하나 더 있었다. 1962년에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 메넨 아스파우 황후의 것이었다. 두 석관은 동일한 형태로 아직도 그곳에 서 있다.
성당 뜰에는 수천 명이 모였다. 정부는 공식 행사가 아니라고 선을 그었지만 사람들은 알아서 왔다. 노인들이 울었다. 전 세계에서 날아온 순례자들도 있었다. 자메이카에서, 런던에서, 뉴욕에서 온 라스타파리 신도들이었다. 그들에게 이 관 속의 인물은 폐위된 군주가 아니라 지상에 내려온 신이었고, 25년 전의 죽음조차 실은 일어나지 않은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 황제의 마지막을 지키는 노병과 슬퍼하는 여인들
하나의 생애, 여러 개의 얼굴
한 사람의 생애가 이토록 다르게 해석되는 경우는 드물다. 에티오피아의 젊은 세대에게 그는 농민을 굶겨 죽인 봉건 압제자이고, 어떤 노인들에게는 나라를 지킨 마지막 황제이며, 카리브해 사람들에게는 신이고, 국제정치사에서는 파시즘에 맞서 집단안보를 호소한 망명 지도자다. 그리고 한국인들에게 그는 아프리카에서 유일하게 지상군을 보내준 나라의 통치자다.
이 여러 얼굴은 서로 모순되지만 전부 사실이다. 이 책은 그 모순을 해결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그 모순 안에 20세기 아프리카가 통째로 들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시도다. 이야기는 삼천 년 전, 예루살렘의 왕궁에서 시작해야 한다.

▲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 (Times, 1936년)
- 시바의 여왕과 그의 후손들
성경, 그 이후의 이야기
성경 열왕기상 10장에는 시바의 여왕이 솔로몬 왕을 찾아가는 대목이 나온다. 그녀는 어려운 질문으로 왕을 시험했고, 왕은 모든 질문에 답했다. 여왕은 감탄했고, 두 사람은 선물을 주고받았고, 여왕은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성경의 서술은 거기서 끝난다. 에티오피아의 이야기는 정확히 이곳에서 시작된다.
14세기에 정리된 『케브라 나가스트』, 우리말로 옮기면 『왕들의 영광』 이라는 책이 있다. 이 나라의 국가적 서사시이자 사실상의 건국신화인데, 그 책에 따르면 시바의 여왕은 빈손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에티오피아 사람들은 그녀를 마케다라고 부른다. 마케다는 솔로몬의 아이를 임신한 채 귀국했고, 그 아들의 이름이 메넬리크였다.
청년이 된 메넬리크는 아버지를 만나러 예루살렘으로 갔다. 솔로몬은 아들을 반겼고 왕국의 절반이라도 주려 했으나 메넬리크는 어머니의 나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그가 떠날 때, 이스라엘 장로들의 장자들이 함께 따라나섰다. 그리고 그들은 성전에서 언약궤를 가지고 나왔다. 훔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그렇게 하도록 허락하셨다는 것이 이 이야기의 핵심이다. 하느님의 임재가 예루살렘을 떠나 에티오피아로 옮겨왔고, 그리하여 이 고원의 나라가새로운 시온이 되었다.
언약궤를 지키는 사제
에티오피아 정교회는 그 언약궤가 지금도 북부 악숨의 시온의 성 마리아교회 경내에 보관되어 있다고 믿는다. 오직 한 사람의 수호 사제만 그것을 볼 수 있고, 그는 임명받는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담장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외부인은 물론이고 총대주교도 볼 수 없다. 전국의 모든 교회는 그 궤의 복제품인 타보트를 지성소에 모시며, 타보트가 없으면 건물이 아무리 훌륭해도 교회로 인정받지 못한다. 이 나라에서 교회의 본질은 건축물이 아니라 그 안에 든 상자다. 역사학자들의 견해는 당연히 다르다. 솔로몬은 기원전 십세기 인물이고 악 숨 왕국이 성립한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다. 악숨의 왕들이 스스로 솔로몬의 후손이라 주장한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케브라 나가스트』는 족보가 아니라 문학이다. 그러나 신화의 힘은 그것이 사실이냐 아니냐에 있지 않다. 그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었느냐에 있다.

▲ 솔로몬 황제와 시바의 여왕 마케다
솔로몬 왕조의 시작
1270년, 예쿠노 암라크라는 아마라계 지방 영주가 군사를 일으켜 자그웨 왕조의 마지막 왕을 무너뜨렸다. 객관적으로 이것은 찬탈이었다. 그런데 그는 자기 행위를 찬탈이라 부르지 않았다. 복원이라고 불렀다. 논리는 이러했다. 에티오피아의 정통 왕조는 솔로몬과 시바의 후손인 악숨 왕가다. 자그웨는 이스라엘의 집안이 아닌 자들이 끼어든 것이었고, 자신은 끊어진 정통을 다시 이었을 뿐이다.
『케브라 나가스트』가 문서로 정리된 것은 예쿠노 암라크가 죽고 사십 년쯤 지난 뒤로 추정된다. 다시 말해 이 신화는 왕조를 정당화하기 위해 왕조가 뒤늦게 정비한 이야기다. 정치적 필요에서 만들어진 이야기치고 이것은 지나칠 만큼 오래 살아남았다. 1270년부터 1974년까지, 칠백 년이다. 유럽의 어떤 왕조도 이만큼 버티지 못했다. 그리고 그 마지막 계승자가 하일레 셀라시에였다.
헌법에 적힌 족보
여기서 반드시 짚어야 할 대목이 있다. 이 신화가 20세기까지도 은유로 남아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1955년에 하일레 셀라시에 본인이 공포한 개정 헌법에는, 황제가 예루살렘의 솔로몬 왕과 에티오피아의 여왕인 시바의 여왕 사이에서 태어난 메넬리크 1세의 혈통을 한 번도 끊기지 않고 이어받았다는 조항이 들어 있다. 라디오와 항공기와 유엔이 있던 시대에, 구약성서의 족보가 법조문으로 명시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대목에 하일레 셀라시에라는 인물을 이해하는 첫 번째 열쇠가 있다. 그는 학교를 세우고 헌법을 만들고 노예제를 폐지한 근대화 군주였지만, 그 개혁을 밀어붙이는 권위의 근거는 삼천 년 전 신화에서 끌어왔다. 그는 근대의 도구로 전근대의 정당성을 지켰다. 이 조합은 한동안 놀랍도록 잘 작동했지만, 결국 그를 무너뜨렸다.

▲ 솔로몬 왕가의 문장
에티오피아 정교회
신화와 함께 이 나라의 뼈대를 이루는 것이 교회다. 에티오피아 정교회 테와히도 교회는 사세기, 악숨의 에자나 왕 때 국교가 되었다.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공인한 것과 거의 같은 시기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식민지 시대 이전부터 존재해 온 유일한 기독교 교회이며, 오늘날 동방정교 계열 가운데 신자 수가 가장 많다.
이 교회는 우리가 아는 기독교와 상당히 다르다. 토요일과 일요일을 모두 거룩한 날로 지키고, 남자아이의 할례를 행하며, 먹어도 되는 음식과 안 되는 음식을 구분한다. 구약의 흔적이 유난히 짙게 남아 있어서, 이 나라의 기독교를 두고 유대교의 사촌 같다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다. 금식일은 평신도 기준으로도 일 년에 백여 일, 성직자는 이백 일이 넘는다. 그 오랜 금식 전통이 세계적인 수준의 채식 요리를 만들어냈다. 아디스아바바에서 수요일이나 금요일에 식사 자리를 잡으면 상대가 고기를 들지 않을 가능성이 높은데, 무례가 아니라 신앙이다. 달력도 다르다. 에티오피아력은 그레고리력보다 칠 년 남짓 늦고 새해가 9월에 시작한다. 하루의 시작도 자정이 아니라 해 뜨는 시각이다. 이 나라가 자기만의 시간 위에서 살아왔다는 사실을 이보다 잘 보여주는 것은 없다.
천육백 년 만의 독립
그런데 이 자부심 강한 교회에는 기묘한 결핍이 하나 있었다. 천육백 년 동안 자기 나라 사람을 수장으로 세우지 못했다는 것이다. 교회의 우두머리인 아부나는 언제나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콥트 교회가 파견한 이집트인 성직자였다. 나라는 유럽에 굴복한 적이 없는데, 교회는 남의 손에 달려 있었다.
하일레 셀라시에는 이것을 바꾸려 했다. 1942년과 1945년, 그는 콥트 교회 성회에 에티오피아 주교의 독립적 서품권을 요구했고 거절당했다. 그는 관계를 끊겠다는 말까지 꺼내며 압박했다. 1948년 마침내 합의가 이루어졌고, 1951년 게브레 기요르기스라는 이름의 성직자가 아부나 바실리오스가 되었다. 천육백 년 만의 첫 에티오피아인 수장이었다. 그리고 1959년, 알렉산드리아의 교황 키릴로스 6세가 그를 초대 총대주교로 세우면서 에티오피아 교회는 완전한 자치를 얻었다.
이 일은 국제 뉴스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아프리카 대륙이 유럽으로부터 정치적 독립을 쟁취해 가던 바로 그 시기에, 에티오피아는 천육백 년 묵은 종교적 종속을 스스로 풀었다. 에티오피아 사람들에게 이것은 그의 여러 업적 가운데 가장 깊이 남은 일 중 하나다.
교회와 왕조는 서로를 떠받쳤다. 왕은 솔로몬의 후손이기에 다스릴 자격이 있었고, 그 계보를 보증하는 것은 교회였다. 교회는 왕의 보호 아래 토지를 소유하고 권위를 유지했다. 이 결합은 칠백 년을 갔고, 1974년에 한꺼번에 끊어진다. 데르그가 황제를 끌어내린 뒤 가장 먼저 한 일 가운데 하나가 교회의 국교 지위를 박탈하고 교회 소유 토지를 국유화한 것이었다. 그들은 무엇이 이 체제를 지탱해 왔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 2편에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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