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서부 여행기 (10) - 그랜드 캐년 헬기 투어

헬리콥터를 처음 타본 건 군대에서였습니다.
한미 연합훈련 때 영어도 못하는 주제에 어찌어찌 통역병으로 끼어 있다가 미군 헬기를 탔었죠.
20분 쯤 동두천 밤하늘을 날아 야산으로 이동했는데, 평소 같으면 촌스럽다고 생각했을 동두천 유흥가의 네온사인마저 어찌나 예뻐 보이던지.
훈련 중이라는 것도 잊고 창밖 야경에 넋을 놓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10년 후, 미국 여행 중 그랜드 캐년에서 다시 헬기를 타게 됐습니다.
동두천 유흥가도 그렇게 예뻤는데, 그랜드 캐년이라니.
기대가 되지 않을 수가 없네요.

아침식사를 마치자마자 헬리콥터 공항으로 향했습니다.
한쪽 벽면에는 안전 운항으로 받은 상패들이 덕지덕지 걸려 있습니다.
원래 안전 불감증을 달고 사는 사람이라 별로 위험성에 대해선 별로 신경 쓰이지 않습니다.
운나쁘면 가는거죠. 인생 뭐 있습니까.

탑승 수속을 마치고 안전교육을 받습니다.
헬리콥터가 생각보다 무게에 민감해서 비행 중에는 가급적 몸을 움직이지 말라고 합니다.
그 밖의 교육 내용은 대략 이렇습니다.
“조종사 아저씨 말 잘 들으세요.”
네.

안전교육을 마치고 헬리콥터 탑승장으로 이동합니다.
예약할 때부터 몸무게를 등록하더니, 헬리콥터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좌석까지 임의로 배정합니다.
안전을 위한 조치라니 뭐 어쩌겠습니까.
그런데 이 사람들이 Maria와 저를 떼어놓습니다. ㅠㅜ
헬리콥터의 무게중심은 지켰지만, 제 마음은 무너지는군요.

함께 헬리콥터를 탈 멤버들입니다.
Renae, Karon, Kat, Jesse, 그리고 the Crazy Kimberly.
Karon은 아마 저와 몸무게를 맞춰 배정한 것 같습니다. 헬리콥터의 균형을 위해 좌석을 임의로 정한다네요.
탑승 전에는 노란색 안전 주머니도 하나씩 허리에 채워줍니다.
낙하산인감?

다른 사람들의 헬리콥터가 하나둘씩 이륙하기 시작합니다.
수많은 헬리콥터가 내뿜는 프로펠러 굉음에 옆 사람과의 대화조차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헤드셋을 착용합니다.
그런데 이게 일방통행입니다.
조종사 아저씨가 하는 말은 잘 들리는데, 마이크는 작동을 안 하네요.
“야~~!!!!!”
마이크 버튼을 눌러보고 별짓을 다 해봐도 묵묵부답입니다.
애들에게 그동안 갈고 닦은 유창한 기내방송 실력을 뽐내려 했는데…
다행입니다.

드디어 제가 탄 헬리콥터도 이륙합니다.
순식간에 땅에서 멀어지네요.
저 멀리 주차장에는 컨티키 버스 한 대가 덩그러니 보입니다.
방금까지 저기 앉아 있었는데, 벌써 다른 세상에 진입한 것 같습니다.

두두두두~~
조종사 아저씨가 사슴도, 곰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포레스트 레인저 빙의해서 산을 샅샅이 뒤져봤지만 아무것도 안 보입니다.
사슴 대신 멀미가 먼저 나타날 것만 같군요

고도를 조금 더 높이자 그랜드 캐년의 언저리가 눈에 들어옵니다.
이렇게 평탄하게 솟아 있는 고원 한가운데가 깊게 파여 있다니…
보고 있어도 참 신기한 지형입니다.
미니어처로 만들어 놓으면
녹차 티라미수 위에 커피 몇 방울 흘려 놓고 패인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 싶네요.

점점 그랜드 캐년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때맞춰 헤드폰에서 영화 <클리프행어(Cliffhanger)>의 주제곡이 흘러나옵니다.
역시 미국인들은 쇼를 구성하는 데는 타고난 재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랜드 캐년에 접근하는 순간에 딱 맞춰 이런 음악을 틀어주다니…
탑승자의 만족도를 높이는 데 이만한 연출이 또 있을까요.
절로 감동의 물결이 밀려옵니다.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던 모습과는 또 다른 장관입니다.
역시 그랜드 캐년은 위에서 봐야 스케일이 제대로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협곡의 길이가 무려 447Km.
서울에서 부산까지 거리와 비슷한 수준입니다.
깊이도 최대 1,500m에 이른다고 하니…
이 정도면 ‘그랜드 캐년’이라는 이름을 붙일 만합니다.

Kimberly도 무척 감동받은 표정입니다.
맨날 춤추는 것에만 관심이 있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순진한 표정도 지을 줄 아는군요.
“지금 기분이 어때?” 하고 물었더니,
자기 귀를 가리키며 손을 내젓습니다.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안 들려~”
“응, 사랑한다고!”
이럴 때 지르지 언제 질러 보겠습니까?

너무나 멋진 광경에 연신 셔터를 눌러댑니다.
“이 중에 몇 장은 걸리겄지.”


제 옆자리에 앉았던 Renae도 참 친했던 친구입니다.
호주 아이라 그런지 처음엔 말을 알아듣기가 좀 힘들었는데, 제가 못 알아들으면 알아들을 때까지 쉬운 영어로 다시 설명해 주곤 했습니다.
사진을 찍다가 제가 자리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으면 어느새 제 자리까지 챙겨주던 친구였지요.
참 다정했던 Renae의 모습이 지금도 그립습니다.
미국 여행이 끝난 뒤에도 멕시코를 거쳐 남미까지, 혼자 거침없이 여행을 이어가던 당찬 아가씨였습니다.

헬리콥터는 방향을 틀어 계곡을 따라 이동합니다.
그런데 이쪽으로 오니 역광이 들기 시작합니다.
둥그스름한 창문에 햇빛까지 반사되니 사진 찍기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닙니다.
거기에 줄무늬 옷까지 입고 있으니… 참 여러모로 아쉽습니다.
하필이면 이쪽 경관이 훨씬 더 멋있었거든요.

한참 아래로는 콜로라도 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이 강을 쭉 따라 내려가면 거대한 후버댐이 나오고, 계속 내려가면 멕시코의 캘리포니아 만까지 이어진다고 합니다.
사실 제 버킷 리스트 중 하나가 바로 그랜드 캐년 래프팅입니다.
6박 7일 동안 콜로라도 강을 따라 내려가며 중간중간 야영을 하는 코스입니다.
7일 동안 함께 래프팅을 하며 고생한 사람들은 평생의 친구가 된다고 하네요.
듣기만 해도 꽤 낭만적인 여행입니다.
물론 지금은 비용이 4,400달러나 한다니 만만치 않습니다.
그래도 언젠가는 꼭 해보고 싶습니다.
죽기 전에 한 번쯤은 콜로라도 강에 몸을 맡겨봐야지요.
http://www.westernriver.com/trips/grand6day/

그랜드 캐년의 창공에 아쉬움을 남기고 헬리콥터 착륙장으로 돌아오는 길입니다.
점점 멀어져 가는 그랜드 캐년의 모습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기분이 들기도 하는군요.

아래로는 경비행기들의 활주로도 보입니다.
이전에 다른 블로그에서 보니 경비행기를 타고도 그랜드 캐년을 관람할 수 있더군요.
헬리콥터와는 또 다른 분위기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때는 저도 경비행기를 한 번 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훗날 나스카에서 경비행기를 딱 30분 타보고는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인생 최악의 멀미를 경험했거든요. 멀미가 어찌나 심하던지 상반신이 마비되더라는....
경비행기? 다시는 안 탑니다.


미국 여행의 매니져 Dylan은 웽웽거리며 하늘을 날아다니는 경비행기를 가리키며 모기같다고 표현하더군요.
멀리서 보면 정말 모기가 날아다니는 모습 같기도 합니다.ㅎㅎ

무사히 안착하여 짧은 헬리콥터 투어를 끝냈습니다.
다른 관광객들을 위해 헬리콥터는 계속 이륙하는군요.
30분이 채 안되는 시간이었지만, 이 시간의 감동은 오래도록 기억될 것 같습니다.
이젠 그랜드 캐년의 협곡 속으로 트레킹을 떠날 차례입니다.
오늘 하루도 바쁘군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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